2020-08-30

몽상 1화

“죽고 싶다.” 나는 입버릇을 중얼거렸다. 죽고 싶다고 자꾸 말하는 사람은 살고 싶다는 의지를 똑바로 말하지 못하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다. 나는 졸렬하게 한 번 더 뇌까렸다. “죽고 싶네.”written by

프롤로그

“그러니까, 몸이 안 좋아요. 저는 조금, 원래 그래요. 어릴 때부터 건강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건강한 사람을 보면 부러워요.”

 북부 윌테라 지방은 춥기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 타지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겨울 풍경이 장관인 도시로 포츠윅을 꼽는다.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몸으로 추위를 체감하는 것은 물론, 집집마다 꽁꽁 언 생선과 고기를 문 앞에 두었다가 귀한 손님이 오거나 식사 때가 되면 얇게 포를 떠서 먹는데 극단적인 추위를 입으로도 이해시키는 대표적 광경이다.
 차디찬 공기가 포츠윅을 감싸면 어린 아이들은 추위에 좋아라 가댁질하며 어른들은 추위를 얘기했다. 개중에는 한파와 상관없이 집에서 고즈넉이 지내야할 사람도 있는데, 루카가 그랬다.
 유월. 아직 겨울이 오려면 멀었지만 포츠윅은 여타 지방에 비해 충분히 건냉했다. 루카는 창문을 닫고 휘장을 쳐서 강렬한 햇빛을 차단하고 2층 방으로 돌아온 뒤, 갈라진 나무잔에 담긴 도토리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마른 입술과 목에 달라붙은 모래먼지는 씻어내렸지만 고질적 두통에 말은 빨리 나오질 않았다. 그는 작게 심호흡했다.

 “그런 게 있어요. 몸을 함부로 혹사하는데 건강한 사람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부러워요. 나는 그랬다가는 바로 안 좋아지거든요. 그래서 가엾단 생각을 해요. 아마 그것뿐이면 덜 슬펐을 테지만, 사람과 사건은 다면성을 가지기 때문에 복잡해져요. 즉슨, 제가 병약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전혀 엉뚱한 관점이 부딪혀올 때가 있단 얘기예요. 몇몇 사람들은 무례한 이유로 저를 냉시했는데 단순한 이유였어요. 겉으로 멀쩡하니 아플 리 없다더군요. 그래서 제 집에 불을 놓거나, 돌을 던지거나, 폭력을 휘두르곤 했죠.”

 윌테라는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무뚝뚝한데 루카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던 이유는 그 점도 상당했다. 제 처지를 담담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와 억양에는 높낮이가 없어 괴리감을 부여했다.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차분하다고 했지만, 루카의 그것은 차분함과 비슷해보여도 거리감이 있는 성격이었으며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면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그는 왼손으로 뒤통수를 긁어 기름진 딱지를 떼어내고 오른손으로 마지막 당과를 집어 먹고는 먼지떨이로 옷을 구석구석 털어냈다.

 “항상 청결해야죠. 도시의 자부심과 시민의 정체성은 위생에서 비롯하니까요.”

 루카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의 안경이 휘청였다. 안경다리는 녹슬었고 고정하는 힘이 약해 균형을 잃기 일쑤였다. 그가 안경을 가다듬으면 옆모습은 얼핏 지적으로 보였으며(오른 눈의 커다란 화상은 그런 인상을 감점시키긴 했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그에게 자문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그러나 그것이 마냥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포츠윅도 여타 도시처럼 자급자족 성질이 강한 도시인데 사람들은 주로 서쪽 커다란 숲에서 열매와 꿀, 나무, 고기 등을 구했다. 부자는 고사하고 형편이 넉넉한 사람조차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사람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라도 날이 풀려있을 때 무리해야만 했다. 지식의 대중화가 안 된 도시는 기초적 지식이 없는 무지렁이들로 인한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특히 숲은 밤에 가거나 깊게 들어가면 괴물에게 습격당하기 때문에 절대로 조심해야 했다. 루카는 그런 사람들에게 조언이나 도움을 주며 받는 대가로 근근이 먹고 살았다.

 “아무튼 방금 이야기 말인데요. 저에게 위협을 행사한 사람 중에는 배은망덕한 사람도 있었어요. 이름도 기억나요. 제리코라는 이름이었는데 독초에 중독됐을 때 치료하고 곰에게 먹힐 뻔한 위험도 도왔거든요. 은혜를 준 사람이 그런 짓을 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어느 날은 저희 집 물을 가져가려는 것을 말렸는데 찌르퉁하게 보더니 그냥 떠났습니다. 그게 화근이었을 거예요. 우스운 일이죠. 그래서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은 싫어요.
 아, 얘기가 조금 달리 가려고 하네요. 첫 얘기로 돌아갈게요. 저는 여러 곳이 안 좋아요. 손, 발, 폐, 심장, 위, 간, 눈, 청력...걸어 다니는 병원이죠? 마법을 연구한 이유는 제 몸을 치료하기 위함도 있어요. 보면 알겠지만, 결과는 당연히 실패였어요. 마법은 마법일 뿐, 만능은 아니었던 거죠. 연금술, 점성술, 의학...무엇 하나 도움이 되진 못했어요.”
 “아가씨.”

 루카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뒤에서 여성이 말을 걸었다. 말투는 공손하되 그 안에는 존중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격식을 차리기보다는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부르는 것처럼 어색했다.
 형편이 조금 넉넉했더라면 말을 잘 듣는 메이드를 고용했겠지만 루카는 그런 여유도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고용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로라, 무슨 일이야?”
 “식사시간이어서요. 초다짐은 흑빵과 치즈, 주식은 콩 수프입니다.”
 “다른 건?”
 “훈제 청어와 순무 요리라면 바로 내올 수 있으니 아무쪼록 드시길.”
 “처음에 말한 것으로 줘.”

 루카는 청어와 순무라는 말에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기분을 참으며 대답했다. 음식에 무신경한 그도 순무라면 진절머리를 쳤다.
 로라가 조용히 방문을 나서고 걸음소리가 멀어질 즈음에야 루카는 다시 먼지떨이를 들고 조용히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가 여태 감던 오른 눈을 뜨자 상대는 흠칫 놀랐다. 루카의 오른 눈이 원래 못 뜨는 거라고 생각했기도 하고, 마치 오크의 눈처럼 빨갛고 혐오와 공포를 품게 만드는 흉한 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얘기를 다시 이어갈게요. 제리코.”

각주

  • 가댁질 : 아이들이 서로 잡으려고 쫓고, 이리저리 피해 달아나며 뛰노는 장난.
  • 찌르퉁하다 : 못마땅하여 잔뜩 성이 나서 말없이 있다.
  • 초다짐 : 정식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요기나 입가심으로 먹는 음식, 혹은 그것을 먹는 행위.

 나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돌침대에 묶어둔 제리코를 구석구석 털었다. 제리코는 신음 하나 없이 눈동자만 느릿느릿 굴리고 있었다. 그는 내 뒤편에 있는 편태를 못 본 척 허공만 찾아 시선을 헤맸다.

 “이게 신경 쓰여요?”

  편태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리코의 불안과 달리, 나는 약간 숨을 고르며 편태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여러 번 휘두를 체력도 없어요. 당신을 그렇게까지 해할 이유도 없고요. 물론 호년한 것은 불쾌했지만 지금은 그것과 별개의 상황이고요. 뭐 좀 물을게요. 대답이 어려울 테니 긍정할 때에만 고개를 끄덕여요. 알겠죠? 좋아요. 그렇게 끄덕이면 돼. 내가 미워요? 그건 아닌가보네요. 아니라고 할 땐 고개를 저어요. 이해가 됐나요? 좋아요. 아니다, 차라리 입을 풀어줄게요. 대신 함부로 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위험해질 거예요. 그러니 조심해요. 알겠죠?”

 나는 제리코의 입을 풀어준 다음에 이윽고 그의 고환을 팔꿈치로 내려찍었다. 그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소리를 안 질렀어도 무심결에 내려찍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풀어주면 바로 소리를 질렀고, 그 때문에 나는 입을 풀자마자 고통을 가하는 버릇이 생겼다. 고전적 조건 형성, 그러니까 파블로프의 개처럼 말이다. 아무튼 그의 남성성에는 애도를 빌어야할 것이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하며 몸을 떨었다. 문득 나는 작년 생일에 그가 내게 들개 고환을 선물했던 일이 떠올랐다.

 “페이서.”

 나는 마법으로 그의 고통을 멈춰주었다. 제리코는 갑자기 고통이 사라지자 눈물을 멈추고 나를 두렵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아가씨.”

 문 너머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고 내가 고개를 돌리자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필시 내가 주의를 돌렸으니 다시 소리를 지르려는 것이겠지. 조용히 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고 몸성히 나갈 거란 기대도 못할 상황이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헬레트.”

 다만 나는 고통을 없애는 마법을 걸어준 적은 없다. 그게 맹점이었을 것이다. 아까부터 모였던 고통이 한 번에 몰려오자 제리코는 눈을 뒤집었다. 두 번의 격통이면 어느 정도는 사람들도 침착해진다. 때에 따라선 그 이상도 해야 하지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아무런 이상 없다. 오늘도 평소대로 할 뿐이다. 나는 이제야 로라에게 대답했다.

 “들어와.”

 로라는 아까같이 태연히 들어와서 제리코를 흘끗 보고는 테이블에 빵과 치즈를 얹은 접시를 놓았다.

 “수프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니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는 용건만 말하고 바로 나갔다. 이런 광경을 보고도 저 정도로 관심조차 안 가지는 건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나는 딱딱한 흑빵을 부수어서 입안에 넣고 굴리며 천천히 녹였다. 거의 다 씹을 때 치즈를 잘게 나누어서 한 점 먹고, 목으로 넘길 쯤에 제리코가 눈을 떴다. 나는 그의 입에 흑빵과 치즈를 넣었다.

 “천천히 먹어요. 방금 같은 꼴을 더 당하기 싫으면요.”

 제리코는 초췌한 몰골에 식은땀을 흘리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마지못해 음식을 먹다가 목소리를 떨며 내게 물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그는 자기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른다. 내가 제리코를 붙잡아온 것은 그를 향한 복수 때문은 결단코 아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많고 그에 웅절웅절하면 끝이 없다. 그저 그가 이번 순서였을 뿐이다. 그러나 제리코에게 그것을 이해시키기는 굉장한 수고가 드는 일이며, 성공한다고 해도 용서나 양해를 바랄 수는 없었다.

 “왜, 라고 하면 대답할 수는 있지만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울 거예요. 분소하자면 나는 사람이 필요했고, 당신은 조건에 부합했어요. 그래서 데려온 거고요.”
 “그러니까 왜 하필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방금 말했어요. 당신이 적합한 사람이었을 뿐이에요.”
 “뭘 위한?”
 “잘 살기 위한?”
 “뭐?”
 “당신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겠네요. 내 기준에 맞춰서 말하면 그래요. 잘 살기 위해서 이러는 거죠. 당신한테 맞춰서 설명하기는 어렵고요.”
 “그러니까 네가 잘 사는 거랑, 날 가두고 괴롭히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미친년아!”
 “말한 지 얼마 안 지났는데 또 호년하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애초에 당신 이해는 바라지도 않아요. 이해한다고 내 뜻에 맞춰줄 리도 없고요.”
 “미친 걸레년.”

 그는 욕을 걸걸하게 잘하는 사람이겠지만, 구태여 더 들을 필요가 없어서 나는 집게로 그의 손톱을 뽑았다. 뿌리가 뽑히는 소리와 함께 손톱이 말끔하게 분리되자 제리코는 짧은 욕설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의자에 앉아 빵과 치즈를 먹었다. 그를 조용히 시킬 수도 있지만 건드리기 귀찮았다. 나는 고문과 복수를 위해서 그를 감금한 게 아니며, 이 시간을 즐기지도 않았다. 고통이 수반되어야만 그가 말을 잘 따를 것이기에 고통을 준 것이지, 필요가 없으면 굳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소일거리를 저지르지도 않는다. 그뿐이었다.
 그가 발버둥을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로라가 수프와 맥주를 가져왔다. 짜고 비린 콩 수프를 질척한 맥주로 중화시키는 식사(애초에 이 행위를 감히 식사라고 불러도 될 지도 의문이지만)는 상당한 고역이었으며, 이것을 수프와 맥주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적응이 어려운 부분이었다. 차라리 찐 감자가 훨씬 낫겠지만 불행하게도 작물은 전부 더뎅잇병에 걸려서 내다 버렸다. 당분간은 식탁 위에서 구경하기 힘든 몸이 됐다는 얘기다. 몇 십 분이 지났을까, 제리코는 간신히 숨을 골랐고 나는 그에게 수프와 맥주를 먹였다.

 “제발 날 내보내줘. 제발!”
 “거의 다 끝났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넌 괴물이야. 더러운 괴물이라고. 진작 알아봤어야 했어. 퉤!”

 그는 내게 먹던 것을 뱉으며 흉흉하게 노려봤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눈빛이었다. 예사로운 일이며 문제없다. 애피타이저뿐이라 먹은 양이 적지만, 이런 태도라면 주식은 넘기는 쪽이 낫겠지. 나는 더 이상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을 내렸다. 오늘 목적은 그의 위장이다. 점잖지 못한 분위기가 계속 되면 내가 지친다.
 나는 거대한 쇠 지팡이를 들고 와서 그의 배를 내려찍었다. 아무리 무겁고 힘을 실었다지만 지팡이는 손쉽게 그의 몸을 뚫고 침대까지 닿았다. 나는 비사회적이지만 살인광은 아니다. 작업은 나로서도 유쾌하지 않으며, 매번 이런 방어기제적 생각을 반복해야만 할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도록 지혈하고 잠들게 했다. 이제 지팡이가 제리코의 위장을 분석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하루에서 이틀쯤 걸리겠지. 변덕쟁이 년이 이번에는 몇 분을 줄까. 나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환생을 한 사람이다.

 전생에는 아마 평범한 여자로 살았겠지. 마치 2살 때의 일을 기억하기 어려운 것처럼, 내 전생도 부분적으로만 떠오른다. 어느 연도에 살았는지도 모르며, 현대에 살았다는 것과 지식 약간만 안다.
 기억이 희미하니 추억과 그리움도 희미하다는 점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수학, 과학 등의 지식은 망상으로 깨우칠 리 없는 까닭에, 현대와 지금을 비교할 수 있는 상황이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소설처럼 가련하거나 호화로운 삶은 아니었다. 중세는 현대에 비하면 처참한 점은 셀 수도 없었으며 천애고아에 몸은 엉망진창. 재능이라도 있어서 도둑질과 약탈로 돈을 구해 자리를 잡았지만 몸에 달라붙은 질환은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요약하면, 건강한 일상을 한 순간도 누릴 수 없었다. 이전 삶의 기억이 옅은 것도 있지만, 몸의 고통이 이어질수록 마음도 사나워짐을 느꼈다.
 10년 전. 모든 시작은 거기부터였다. 괴물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침착한 아이라서 다행이네요. 어디로 가는 길인가요?”
 “알아서 뭐하게?”

 그는 지극히 예스럽고(그러나 촌스럽지 않은) 깔끔한 복장에 매우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봐도 귀족 아가씨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가 나를 똑바로 보며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무의식 속에서 그를 어떻게 대할지 깨달았다.
 그건 스스로도 놀랄 만큼 미친 짓이었다! 경비병이 있었다면 단칼에 나를 베었을 것이며, 마을 사람이 봤다면 나를 마구간으로 끌고 가서 머리가 찌그러질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고 닷새를 가뒀을 것이다(그리고 시체 썩은 내가 풍기기 전에 걷으러 왔을 것이다.)
 나는 그가 추궁하지도 않았는데 쓴물을 삼키며 퉁명스레 말했다.

 “내 몸을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어.”
 “그렇군요. 그 연령대에 그 정도로 몸속이 망가진 경우는 처음 보네요. 조금 재미있어요.”
 “귀족이 아닐 줄 알았는데, 설마 귀족이야?”
 “아뇨. 당신도 짐작하고 있듯이 나쁜 존재입니다.”

 귀한 자가 하찮은 자에게 말을 거는, 심지어 호의적인 태도로 다가온다는 설정은 미치광이의 기담괴설에도 없을 것이다. 이 상황이 말이 안 된다고 해도 원래라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며 두려움에 덜덜 떠는 게 지당하다.
 그것은 대칙(大則)이다. 상식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원칙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상하다는 사실을(환생을 했다는 것을 감안해도)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런 것 치고는 말이 너무 인간다워서. 정확히는 귀족다워서 물어봤어.”
 “이래봬도 인간을 탐구하는지라 인간답게 말하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거든요.”
 “적어도 지금처럼 말을 거는 건 안 좋아. 애초에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야. 아니면 분위기를 바꾸던가.”
 “좋네요. 다음엔 그럴게요.”

 맙소사. 이 세상에 익숙해진 바람에, 그리고 지금이 이상한 상황인 까닭에 나는 그가 방금 했던 말이 황당무계함을 한 발 늦게 이해했다. 이런 차림을 한 아가씨가 스스로 나쁜 존재라고 말하면서 거렁뱅이와 대화를 한다? 그가 진짜 귀족이었으면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시간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처구니없기도 하지! 이 얼마나 엿 같은 상황이람? 나는 한심한 기쁨에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특이한 존재니까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지. 볼 일 없으면 가봐.”
 “볼 일이라면 지금 생겼어요. 당신한테요.”
 “뭔데? 나한텐 빼앗아갈 것도 없어.”

 만약 그가 어린 계집아이의 처녀성이라도 원한다면 나는 그가 정말로 악마인지 진지하게 재고할 예정이었다. 악마라고 하면 좀 사악하고 비인간적이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예사로운 인간과 정말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곧바로 내 생각을 정정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만년 발정 말대가리도 성스러운 동물이라고 받드는 세상이다. 뭐만 하면 인간 처녀를 바치라는 설정이 어디 한 둘이던가? 도마뱀, 말, 소, 신, 뱀, 지렁이, 너구리, 여우…지적능력은 인간을 초월한다면서 머저리인 종족이 너무 많은데 악마라고 그런 취향이 없으란 법은 없겠군.

 “무가치한 것에는 관심 없어요. 거래를 하고 싶어요. 당신은 집념이 있어 보이거든요.”

 그의 말에 나는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수치심과 모멸감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이다. 입안이 맹렬하게 저렸다.

 “원하는 게 뭔데?”
 “사람. 당신이 사람을 가져온다면 나는 건강을 주도록 하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강도를 죽였을 때 그는 내게 30분 동안 심장만 자유를 주었다. 진실을 조금 숨겨서 말한 점이 그야말로 인간답고 사기꾼다웠다.
 당연히 나는 그 뒤로도 거래를 이어갔고 사람을 죽이는 죄책감, 건강하다는 쾌락, 다시 병약해짐으로 찾아오는 절망들이 순환하고 쌓이는 동안 몸의 지병은 점점 몸을 더 잠식하고 나는 초조해졌다. 결국은 임시방편의 반복이다. 치료법을 연구하는 동안 눈은 반쪽짜리가 됐다.
 고통의 연속으로 미쳐버린다면 그 모습도 그 인간의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극단에 치달은 인간의 모습도 참모습의 하나라고 한다면, 나도 내 본질을 체관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체관, 그야말로 체관이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지? 선과 악의 개념을 배운 나는 무슨 생각을 하지? 나는 선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던가?
 밉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밉고, 건강한 자가 밉다. 나에겐 부러운 것을 당연히 가진 그들이 밉다. 그들이 당연케 여기는 것을 부럽다고 생각하는 내가 밉다.
 세상 모든 일에 인과가 있다면, 내가 노력으로 얻은 것들을 그들은 왜 못 얻지? 그리고 그들이 아무런 노력도 안 하고도 가진 것을 나는 왜 못 가지지?
 나는 오른 눈을 파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선별’을 위한 눈은 아둔함의 증거요, 나를 죽이는 흉물이었다. 수 억 마리의 개미와 파리가 오른 눈에서 기어나와 온 정신을 기어다니고 주변의 공기까지 갉아먹는 것과 같은 정신적 고통과 혐오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로라, 로라!”

 나는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방문을 뛰쳐나와 짧은 인내심을 못 견디고 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층층이 내려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스멀스멀 올라오는 퀴퀴한 냄새가 나를 더 화나게 했다. 모든 게 빌어먹게 X같은데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하지?
 이 집의 피고용인이자 감시자께서는 내가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서야 등장했고 나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한 번 더 정신을 소모했다.

 “그 빌어먹을 년 불러. 세비히트. 그 악마 년 데려와. 얼마나 걸리지?”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의 부하는 맞지만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거든요.”

 로라는 무심한 눈빛 그대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서로 연락 잘 되고, 관심을 좀 가졌으면 좋겠건만 뭐 하나 되는 게 없다.
 책 속에서 악마의 종은 악마에게 충성을 바치고, 아무튼 뭔가 시원시원했는데 이 빌어먹을 주종은 말만 주종이지 더럽게도 쓸모가 없었다.

 “내가 당장 뒤질 것 같으니까 오라고 해.”
 “안 됩니다. 그런 이유면 무시하라고 했거든요.”

 미치겠군,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들고 펑펑 울고 싶어졌다. 도대체가 충성심도 없으면서 말은 충직하게 따르는 부하라니!

 “그럼 걔 어디 있어. 내가 찾아가면 되잖아.”
 “그것도 모르죠. 워낙 이 인간 저 인간이랑 거래하고 다니다보니.”
 “난봉꾼도 아니고 진짜 왜 그러는데? 이 마을에도 있어?”
 “있던 거 같은데 방금도 말했다시피 저도 그 분의 관심 밖이라 잘은 모르죠.”
 “그래, 있던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옳다구나 쾌재를 불렀다. 대단하고 명확한 빌미를 잡아서가 아니다. 솔직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내가 맛이 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년을 엿 먹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무슨 후환이 올지 모르지만 그게 지금 신경 쓸 일이겠는가? 나는 서둘러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가씨?”

 도중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로라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계획을 계속 수정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래, 그냥 마을을 통째로 엎어버리자. 그게 좋겠어.

 “로라, 이 마을을 전부 불태울 거야. 그럼 누구인지 찾아낼 필요가 없겠지?”

 로라는 잠시 멍하니 내 말을 곱씹더니 금세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돼, 미쳤어요?”
 “응. 미쳤어. 이렇게는 못 살아. 차라리 하나라도 그 년과 엮인 사람을 없애고 말지.”
 “그러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요. 진심으로 하는 충고예요.”
 “내가 걔보단 셀 거야.”
 “미치겠네.”

 로라는 당황하더니 아까보다는 한 층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게 물었다.

 “뭐를 원하는데요?”
 “몰라서 물어?”

 안되는데, 로라는 초조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기회라고 느꼈는지 성큼성큼 문 밖으로 향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요. 알겠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도울 수 있다고요.”

각주

  • 체관 : 사물의 본체를 충분히 꿰뚫어 보는 것. 혹은 생각을 끊고 체념하는 것.
  • 웅절웅절하다 : 불평이나 원망, 탄식 따위를 입속말로 혼자 계속 해 대다.
  • 분소하다 : 조목조목 나누어 설명하다. 혹은 구실을 대어 변명하다.
  • 호년하다 : 상대를 ~년이라고 부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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